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롤루스 왕조 (문단 편집) === 분열 === [include(틀:프랑크 왕국의 분열)] {{{#!wiki style="word-break: keep-all" ||<-9>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br]대제[br]—[br]'''신성 로마 황제 초대'''[br]카롤루스 1세 || ||<-3> 서프랑크 ||<-3> 중프랑크 ||<-3> 동프랑크 || ||<-8> [[루도비쿠스 1세]][br]경건왕[br]—[br]'''신성 로마 황제 2대'''[br]루도비쿠스 1세 || 카를 2세[* 부왕인 카롤루스 대제가 공동황제로 임명했으나 단명] || || 피핀 1세[br]—[br]아키텐 ||<-2> [[샤를 2세]][br]대머리 왕[br]—[br]네우스트라시아[br]—[br]서프랑크[br]—[br]'''신성 로마 황제 5대'''[br]카롤루스 2세 ||<-3> [[로타리우스 1세]][br]—[br]이탈리아[br]—[br]'''신성 로마 황제 3대'''[br]로타리우스1세 ||<-3> [[루트비히 2세]][br]독일인 왕[br]—[br]바이에른[br]—[br]동프랑크 || || 피핀 2세[br]—[br]아키텐 ||<-2> [[루이 2세]][br]말더듬이 왕[br]—[br]'''~~신성 로마 황제~~'''[* 대관을 망설였다.][* 4대손 [[루이 5세]]를 끝으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 프로방스의[br]카롤루스[br]—[br]프로방스 || [[루도비코 2세]][br]이탈리아인 왕[br]—[br]이탈리아[br]—[br]'''신성 로마 황제 4대'''[br]루도비쿠스 2세 || 로타리우스 2세 || [[카를 3세]][* [[카롤루스 대제]] 이후 베르됭 조약, 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br]뚱보 왕[br]—[br]슈바벤[br]—[br]알레만시아[br]—[br]'''신성 로마 황제 6대'''[br]카롤루스 3세 || 카를로만[br]—[br]바이에른[br]—[br]동프랑크[* 루트비히 2세의 장남으로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사촌인 루도비코 2세에게 제위를 약속받았으나 삼촌인 샤를 2세 대머리왕이 먼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대관식을 받았다. 단명하여 이탈리아와 제위를 막내 카를 3세에게 상속하였다.][*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가 일시적으로 제위를 얻었으나, 그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 4세를 끝으로 동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된다.] || 흘로도비쿠스 || ||<-9> * 카롤루스 대제와 루도비쿠스 1세는 [[프랑스 왕국]],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에서 각자 자국 왕으로 생각하여 국왕의 대수에 포함시킨다.[br]카롤루스(샤를, 카를로, 카를), 루도비쿠스(루이, 루도비코, 루트비히) * 원래 대수를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별명을 붙였다.[br]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 독일의 루도비코스||}}} [youtube(QaZfhCswRvg)]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크고 아름다운]] 국토에서 비롯된 행정적인 어려움, 민족적 다양함, 지방 귀족들의 강력함과 성직자들과 세속적 귀족들의 라이벌 구도 등 여러 방면에서 내분이 일어나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루도비코]](이), [[루이]](프), [[루트비히]](독) 1세}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815년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 이후 이탈리아 왕으로 삼는다. 둘째 피핀에게 서프랑크의 남부인 [[아키텐]], [[가스코뉴]] 등의 지역을, 셋째인 [[루트비히 2세]] 독일인 왕에게 [[바이에른]], [[슈바벤]] 등 동프랑크 지역을 나눠주기로 한다. 후처에게서 [[샤를 2세]]대머리 왕을 얻자 영지를 조정하여 샤를에게도 [[영지(역사)|영지]]를 나눠주려 했으나[* 실제로 대머리였던 것이 아니라 영지가 없는 것을 머리에 쓸 관이 없는 것에 비유해 대머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829년에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내전은 왕국의 권력을 심각히 약화시켰다. 이후 아키텐의 지배권을 두고 피핀 1세와 샤를 2세 대머리왕이 싸우던 도중 838년 피핀 1세가 죽자 루도비쿠스 1세는 다시 한번 아키텐을 샤를 2세 대머리왕에게 넘겨주려 했으나 아키텐 지역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피핀 1세의 아들인 피핀 2세가 상속받는다. [[파일:Carolingian_empire_843.svg.png|width=300]]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장남 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려 하였다. 이에 루트비히 2세 독일인왕과 샤를 2세 대머리왕과 [[스트라스부르 서약]]으로 힘을 합쳐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리우스 1세에게 대항하였고 아키텐의 피핀 2세는 [[삼촌]]인 로타리우스 1세편을 든다. 결국 세 형제는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만나 프랑크 왕국을 삼분하는 '''베르됭 조약'''을 맺는다. 조약에 의해 샤를 2세 대머리왕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피핀 2세는 아키텐을 노리던 대머리 샤를을 주군으로 섬기게 되었다. 피핀 2세는 반발을 했으나 결국 아키텐마저 잃게 된다. [[삼국지|최종적으로 제국은 3개(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 지역으로 분할된다.]] 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중앙 부분인 [[로트링겐|로타링기아]], [[알자스]], [[부르군트 왕국|부르군트]],[[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을 가졌으며, 루트비히 2세는 제국의 동쪽 부분인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가졌다. 그리고 샤를 2세는 제국의 서쪽 지역인 네우스트라시아(테두리 위쪽)와 피핀 2세에게서 빼앗은 아키텐(테두리 지역) 지역 등을 가졌다. [[파일:621px-Carolingian_empire_855_svg.png|width=300]] 로타리우스 1세 사후, 중프랑크 또한 세 아들이 물려받았는데, 855년 '''프륌 조약'''으로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여 장남 [[루도비코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2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의 조카)가 제위와 이탈리아를,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로트링겐(독), 로렌(프)}로 불리는 중북부를, [[프로방스]]의 샤를이 중남부의 [[부르군트 왕국|부르군트]]를 가졌다. [[파일:621px-Carolingian_empire_870_svg.png|width=300]]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영지를 [[정부]]에게서 난 아들 [[사생아]] 위고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생아라는 법적 지위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채 869년 죽게 된다. [[https://blog.naver.com/iceman123456/222638308363|#]] 로타르 2세의 삼촌들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와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조카손자 위고가 법적 권리가 없는 사생아라고 선포한 뒤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나눠가졌다. 프로방스의 샤를은 869년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의 영지는 루도비코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가 차지했다가 샤를 2세(대머리 샤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https://blog.naver.com/iceman123456/222639522197|#]] '''메르센 조약은 [[중세]] [[유럽]]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조약이다.''' [[파일:300px-Vertrag_von_Verdun_und_Ribemont.svg.png|width=300]] 이후 880년 2월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왕 카를만이 병으로 상속권을 두 동생에게 분배할 때, 청년 루트비히 3세와 비만왕 카를 3세,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 간에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조약으로, 이 조약에서는 870년 8월 8일 메르센 조약에 의해 분할되었던 로타링기아(로렌)를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 3세가 차지한다고 결정하였다. 당시 서프랑크는 대머리 카를 2세와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의 연이은 죽음으로 서프랑크 왕국이 내분에 빠진 틈을 타 결정된 것이었다. [[파일:Carolingian_empire_887_svg.png|width=300]] 이렇게 베르됭, 프륌, 메르센,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은 887년 [[카를 3세]]에 의해 일시적으로 재통일되었으나 이후 다시 분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